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(문단 편집) === 율사로서 === 스빈후부드는 1878년 16살로 [[헬싱키 대학교]]에 입학해 1881년 학사, 1882년 석사, 1886년 율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. 이후 변호사 자격을 얻고 [[스웨덴계 핀란드인|스웨덴계]]가 다수 거주하는 도시 [[투르쿠]] 항소심재판소의 판사보가 되었다. 1882년에는 불과 31세로 [[핀란드 원로원|원로원]]([[핀란드 대공국]]의 행정부) 입법위원회에 법무관료로 임용되어 세법을 개정했다. 1894년부터는 핀란드 스빈후부드가 당주로서 신분제의회 의원으로 출석했다. 스빈후부드는 세법개정에 싫증을 느끼고 1902년 투르쿠 항소심재판소로 돌아갔다. 같은 해, [[러시아 제국]]의 동화정책에 반발해 징병거부 운동이 일어났는데 [[핀란드인]]들은 이를 러시아 제정이 폭력진압했다며 투르쿠 재판소에 소송이 들어왔다. 스빈후부드는 [[니콜라이 보브리코프]] 총독을 피고로 하는 소송 절차를 진행했다. 빡돈 총독은 스빈후부드 등 판사 여섯 명을 잘라 버렸는데, 핀란드인들은 이것을 폭거라고 받아들였고 스빈후부드는 일약 정치적 유명인사로 부상했다. 원래 스빈후부드는 온건 페노마니아, 러시아 제국 협조파인 [[핀란드당]] 당원이었으나 이 일을 겪고 판사를 조지려 드는 폭거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불의라며 호헌파 [[청년 핀란드당]]으로 전향했다. 스빈후부드는 헬싱키로 상경해 신분제의회에 등원하며 호헌파 비밀결사에 참여했다. [[1905년 혁명]]의 결과 1906년부터 의회개혁이 시작되었고, [[헤이놀라]] 지역 판사로 임용된 스빈후부드는 정치에서 물러나 시골 판사로서 여생을 보내려 했다. 하지만 스빈후부드는 1907년 초대 의회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뿐 아니라 초대 의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. 자당인 청년 핀란드당 뿐 아니라 다수당이었던 [[핀란드 사회민주당|사회민주당]]도 명망이 높은 스빈후부드를 인정해 그를 추천했다. 스빈후부드는 율사 출신답게 의회의장으로서 법치를 강조했으나, 혁명이 가라앉자 러시아 황제 [[니콜라이 2세]]는 매년 의회해산으로 맞섰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핀란드인들을 더이상 믿을 수 없다며 핀란드인 관리들을 [[러시아인]]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. 스빈후부드는 이것이 핀란드 헌법상 위법하다고 판단하고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. 그 결과 스빈후부드는 1914년 [[시베리아]] 유형에 처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